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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오늘의 구절

[2장. 급진주의 페미니즘] 완전히 평등한 세상에서라면?

by 페페연구소 2019. 10. 18.
현대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급진주의 자유의지론이든 급진주의 문화 페미니스트든, 모든 경제, 정치, 친족 체계들이 남녀 사이에 그리고 가능한 한 성인과 어린이들 사이에 평등을 만들어 내도록 구조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떠한 종류의 성적,재생산적 관행을 채택할 것인지 궁금해한다. 그런 평등한 세상에서 여성과 남성이 '남성 가장/여성 주부 성매매'에 참여하겠는가, 아니면 아주 평등하지 못한 우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실천은 고사하고 거의 상상도 해보지 못한 새롭고 평등주의적인 이성애 형태들을 개발하겠는가? 일부 레즈비언들은 계속해서 가학-피학성애와 여자 역할-남자 역할 관계에 참여하겠는가 아니면 모든 레즈비언들이 갑자기 그러한 관행에 의한 성적 흥분이 사라졌음을 느끼겠는가? 여성들은 피임 방법을 더 많이 이용할까, 아니면 더 적게 이용할까? 부부들은 임신모 서비스를 위해 계약을 할까, 아니면 입양을 선호할까? 아이들은 더 많아질까, 아니면 더 적어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공적으로' 재생산하기를 선택할까, 아니면 구식의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재생산하기를 선택할까? (123-124쪽)

2장에서 제기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간의 논쟁들을 주욱 늘어놓은 뒷부분보다, 오지 않을 유토피아를 가정한 앞부분에 마음이 콱 박혔다. 도대체 그런 세상이 어디에 있다고, 언제 온다고 저런 질문을 할까.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모든 경제 체계들이 여성과 남성간의 평등을 만들어내도록 구조화된 사회? 모든 정치 체계들이 여성과 남성간의 평등을 뒷받침해주는 그런 사회? 모든 친족 체계들이 여성과 남성이 계속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구조화된 사회? 저자는 "그런 평등한 세상에서"라면 여성들이 어떠한 선택을 하겠는가 하고 질문하고 있지만, 그 질문의 가정 자체가 나를 걸려넘어지게 만들었다.

이 부분을 번역할 당시의 나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유토피아, 그것도 자유롭고 평등한 유토피아를 가정하고 하는 이 많은 질문들. 사실상 저런 사회가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이런 질문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ㅠ.ㅠ 울고싶어졌다. 한편으로는 이 유토피아적인 질문들에 희망이 그려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울고 싶다."(번역하던 어느 날의 노트 중.) 정말로, 어느 날 어딘가에 다녀오는 지하철 승강장 앞에서, 갑자기 정말 갑자기 이 생각이 나서 울컥했던, 찔끔 눈물도 났던 그 순간이 생각났다.

그 날의 나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안개 자욱한 기차역에서 혼자 기차를 기다리는 저 여자의 모습은 그 날의 나의 기분과 닮아있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놀라운 업적들, 우리도 인간이다~ 라고 비굴하지만 읍소해야 했던 그 시대들을 지나, 멋진 언니들이라고 여겨지는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급진적인 주장들을 모두 다 번역하면서, 일종의 회의감이 들었던 것 같다. 왜냐면 그 이슈들이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1970년대에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했다는 그 이슈들이 2019년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는 나의 삶에서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래서 공산주의 혁명이라도 해봤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언니들은 뭐지..?!' 라고 생각했다. 왜 급진적인 유토피아 비슷한 것은 아직 오지도 않은 건데? 인공 재생산은 반대파가 쌍수들고 반대해서 아직 못 이룬 건가? 그럼 이런 상황에서, 저 유토피아적 가정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이 사회의 모든 구조가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만들어내도록 구조화될 사회란 오지도 않을텐데. 과연 그런 사회가 정말로 올 거라고 생각한 걸까, 로즈메리 통은??? 이런 생각이 들면 매우 우울해지거나 화가 나거나 슬퍼지거나 그 세가지의 짬뽕 아니면 반복이거나 했다. 그래서 그 즈음의 나는 매우 상태가 안 좋았다. 

방금 제기된 위와 같은 종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경험하는 현재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상상하는 미래의 세계에서 찾게 될 것이다. 당분간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섹스의 기쁨과 위험성 모두를 이해하도록 하고 출산과 어머니 노릇의 해방적인 측면과 예속적인 측면 모두를 이해하도록 하는 접근 방식을 개발하는 데 계속해서 선두에 서야 한다. 편파적인 과거의 접근 방식은 인간 억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 문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접근 방식이 양쪽 모두의 접근 방식으로 빨리 대치되면 될수록, 여성과 남성은 남성 지배와 여성 종속이라는 파괴적인 놀이를 더 빨리 그만두게 될 것이다.(124쪽)

그로부터 한참 지나 모든 번역을 마치고 책이 출간된 후인 지금의 나는, 우울-화-슬픔의 악순환에 빠지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하는 일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이 평등한 미래가 아니라 하더라도, 위의 저 질문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만들어가야겠다는 데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위 인용구에 나온 것처럼, 섹스에는 기쁨도 있지만 위험성도 있으며, 출산과 어머니 노릇에도 해방적인 측면과 예속적인 측면 모두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두가지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거대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다. 도대체 언제나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어쨌든 10년 전 혹은 20년 전과 비교하면 그동안 세상은 많이 변해왔으니까. 앞으로도 분명히 변할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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