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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오늘의 구절

[2장. 급진주의 페미니즘] 내 뜻대로 하는 출산?

by 페페연구소 2019. 10. 9.
남성의 출산 과정 침입이 가져온 전반적인 결과는 여성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의 임신을 위해 남성이 만들어 놓은 규칙이 종종 여성의 몸, 정신, 그리고 아기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성이 가진 직관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 에이드리엔 리치는 만일 여성들이 남성 권위자들로부터 임신을 되찾아 온다면, 여성은 더 이상 수동적으로 앉아서 의사들이 그들에게 아이를 가져다주기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대신에 여성은 분만 과정의 고통뿐 아니라 기쁨 또한 경험하면서 출산 과정을 실제로 지휘하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98-99쪽. 에이드리엔 리치의 주장.)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 맞는 말만 한 페미니스트들이 비록 미국이지만 이미 1970년대에 존재했는데, 왜 아직도 출산 과정은 주로 남성인 의사들의 통제와 지휘 하에 이루어지는 걸까. 물론 나의 둘째 출산 담당의는 여자였지만, 내가 굳이 임신중 약물상담 전문인 의사를 찾아 찾아 간 경우였으니. 물론 요즘은 산부인과 의사들 중에 여자가 많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되면 또 의사가 여자냐 남자냐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출산 과정의 주도권이 절대로 산모에게 있지 않고 권위자인 의사에게 있다는 문제가 된다. 

미국에서 첫 아이를 낳을 때,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이나 정보를 알려줄 커뮤니티가 전적으로 없는 상태에서 나는 의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데 환자가 (임산부가 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사를 신뢰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원칙적으로는. 아무튼 그 백인 의사는 나에게 여러 합리적인 듯한 이유로 유도분만을 권유했고, 유도분만을 하러 간 나는 자궁은 열리지 않고 자궁 안 감염이 생겨서 수술을 해야만 했다. 감염 때문에 수술 시 남보다 1.5배가 넘는 피를 쏟았다고 했고, 난 출산 후 아주 한참동안 병자 같았다. 진짜 힘들었다. 아주 나아중에 알았다. 보통 첫 아이는 예정일보다 늦게 나오는 일이 다반사라, 어떤 산모들은 예정일에서 보름이 더 넘어가도 그냥 기다렸다가 나올 때 낳기도 한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예정일보다 3일 먼저 유도분만으로 낳자는 의사의 말이 절대적인 것인 줄로 믿었다. 나중에 출산 후 점검하러 병원에 갔을 때, 그 의사가 다른 산모에게 나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문 열린 오피스 밖에서 듣고 배신감이 든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아기 몸무게가 증가하면 출산시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유도분만으로 출산하자고.... 

나 뿐 아니라 모든 여자들의 출산기는 대부분이 파란만장한 스토리이다. 나 역시 첫아이 출산기를 훨씬 길고 파란만장하게 쓸 수 있으며, 둘째 출산 스토리는 더 길고 파란만장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진통 두 시간만에 낳은 경우도 드물게 있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아 그런데, 에이드리엔 리치라는 여자가 이미 오래 전에, 임신 출산 과정의 주도권을 여성이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그렇게 되면 분만의 과정이 기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아... 어찌보면 여성의 몸이고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주도와 지휘로 이루어지는 게 당연한 일인데, 이런 당연한 일을 말한 사람들이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명명되어야 한다니. 그리고 더 기막힌 것은 아직도 여성이 출산 주도권을 쥐는 시대가 오지 못했다니. 아.. 그런데 또 잘 모르겠다. 요즘의 신세대 산모들은 얘기가 다를까.

그러고 보니 요즘은 서점에서 다양한 위치성에 기반한 다양한 페미니즘 책들이 나오는 것을 목격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임신한 과학자인 여성이 임신과정에 대해 쓴 책을 서점에서 보고 우와~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예전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여자들의 공동체도 거의 없다시피 했고 이런 책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다르구나 싶었다. 올해 7월에 출간된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나 올해 8월에 출간된 '아기 말고 내 몸이 궁금해서', 그리고 그보다 더 전에 2018년에 나온 웹툰 '아기 낳는 만화'도 있다. 한 때는 또 저렇게 훌륭한 주장을 한 에이드리언 리치는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에 나는 도대체 기혼 유자녀 여성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는 롤 모델을 찾을 수 없는 걸까 하고 좌절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단 이 책들과 웹툰을 챙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는 난 이미 다 지나 온 인생의 단계라고 생각했고 힘든 기억을 굳이 저 책들로 인해 꺼내보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에이드리언 리치의 말보다 더 맘에 드는 말들을 발견하게 될지.

맘에 드는 이미지를 찾을 수도 없다. 나의 힘들었던 출산경험과 관련된 이미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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