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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오늘의 구절

[2장. 급진주의 페미니즘] 공동의 아동 양육 ... 즉 공동육아?

by 페페연구소 2019. 10. 7.
[마지 피어시의 유토피아에서] 각 어린이는 세 명의 공동모(co-mothers,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 혹은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에 의해 양육되는데, 그 세 명의 공동모는 어머니 역할을 아주 뛰어나게 잘하는 개인들로 구성된 '어린이 보호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육아는 공동체적 노력이며, 각 어린이는아이 돌봄 기관에서 대집단 경험을, 각 어린이의 공동모들이 거주하는 별도의 주택에서 소집단 경험을 할 수 있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95-96쪽. 마지 피어시의 주장.)
아이들은 반드시 자신을 낳아 준 여성에 의해 길러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아이들은 마음속에서 아이들을 가장 위하며, 아이들의 최상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원이 있는 성인들에 의해 길러져야 한다.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성인들이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아이들을 기르는 특권을 확보하도록 허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104쪽. 앤 오클리의 주장.)
예를 들어, 열 명 이상의 성인이 아이들이 안정된 가족 구조를 필요로 하는 기간 동안 서너 명의 아이들과 함께 사는 일에 동의할 수 있다. ... 이제 기술이 인류를 재생산 책임의 짐에서 해방할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성인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아이들에게 쏟고 싶은지 혹은 아이들과 함께 보내고 싶은지를 결정해야 한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105-106.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주장.)

이렇게도 훌륭한 아이디어들이라니! 생물학적 엄마라고 해서 반드시 그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이런 급진적인 주장을 이미 1970년대에 했었다니!!!! 부모 역할을 뛰어나게 잘 하는 전문가인 세 명의 공동모에 의해 길러지는 아이들. 돌봄 기관에서 대집단 경험을 하고 공동모와 함께 거주하는 가정에서 소집단 경험을 하는 이상적인 모습이라니. 또한 열 명 이상의 성인들과 서너 명의 아이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적 가족 구조라니. 물론 이 때의 가족은 지금의 가족과 다르게 정의되겠지만. 육아의 관점에서 이 얼마나 합리적인 일인가.

29살에 처음 페미니즘을 만나고, 30살에 첫 아이를 낳고, 둘이 하나 키우다가 남편이 먼저 귀국한 후 혼자 하나 키울 수가 없어서 시부모님에게 맡겨 키우고, 학위 마치고 아이를 데려오고 34살에 둘째를 낳고... 독박육아로 미쳐가던 시간들.. 아 나의 그 시간들은 도대체 누가 보상해줄까. 우리나라에도 공동육아를 하는 동네가 있다는데, 왜 나는 그 때 그 동네를 뛰쳐나가 공동육아 하는 곳을 찾아가지 못했나. 그런데 저렇게 훌륭한 아이디어를 낸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왜 그냥 아직도 급진주의 페미니즘인 채로 있는 걸까. 왜 인공 재생산의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나. 왜 세상은 저 위의 주장과 같은 공동모 사회, 공동 육아의 사회로 돌아가지 않는 걸까. 인간들의 쓸데없는 소유욕 때문인 걸까. 자본주의 사회가 데려온 개인주의 때문인 걸까. 아니면 그냥 단순히, 남자들이 정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 걸까. 왜, 왜, 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 명 이상의 성인들과 서너 명의 아이들이라는 정말 이상적인 공동체를 제안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일생에 걸친 정신분열증으로 고통받다가 고독사해야 했을까. 왜 2019년 대한민국은 아직도 '애는 엄마가 키워야지'라는 정서와 논리가 지배적이고 사회적 인프라는 부족해서 육아는 여전히 엄마의 몫인 걸까. 왜. 왜. 왜....... 

Netflix 영화 'I am mother'의 한 장면. 엄마인 로봇은 저렇게 생긴 인큐베이터같은 곳에서 태아를 키우면서 가장 적당한 태아를 골라 출산시킨다. 그렇게 출산시킨 로봇의 딸이 로봇을 엄마로 알고 자라는데, 우연히 태아들이 들어있는 시험관들을 보게 되는 장면. 

임신 출산 육아... 의 긴 과정 전부가 아니더라도 육아의 과정만이라도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어느 페미니즘이든 하여튼간에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분석한다면, 너무도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사실 그 긴 동굴같은 시간을 다시 꺼내어 분석하는 것도 싫다. 내 인생의 그 컴컴한 시간은 더 이상 다시 생각해보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아..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도 육아 중이다. 육아 라고 하면 어린 아이를 기르는 일만을 말하는 것 같은 뉘앙스니까.. 음.. 나는 아직도 엄마노릇 중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엄마노릇을 하다가 죽겠지. 나의 엄마노릇을 하나하나 페미니즘적 렌즈로 분석하기 시작하면 나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처럼 정신분열증에 걸릴까. 아마도 그렇겠지. 아... 갑갑하다. 번역하면서 부딪쳤던, 몇몇 갑갑했던 부분들이 있는데, 이 부분 진짜 갑갑하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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