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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오늘의 구절

[2장. 급진주의 페미니즘] 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 사회

by 페페연구소 2019. 9. 30.
패션 잡지 <보그>의 표지를 우아하게 장식하는 모델들의 완벽할 정도로 날씬한 몸매는 보통 여성의 기준이 된다. 그 누구도 분명하게 "미국 최고 모델들 중 한 명의 이미지대로 당신의 통통한 몸매를 다듬어야 한다"는 명확한 법령을 발표할 필요가 없다. 모든 여성은 그냥 자신들에게 기대되는 것, 즉 아름다운 여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포르노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 온 여성들은 그들에게 기대되는 것이 무엇인지, 성적으로 보수적인 것과, 또한 반대로 성적으로 개방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냥 알고 있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70쪽)

위 인용문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인 케이트 밀릿(Kate Millet)에 관한 서술 부분이다. 케이트 밀릿은 미국의 유명한 작가들 몇몇을 지목하면서, 그들의 소설들에서 여성들은 늘 성적 학대를 당하고 굴욕감을 느끼거나 하는 식으로 묘사되며, 그런 글들을 읽다 보면 여성이나 남성이나 그러한 관계가 이상적인 성적 행동인 것 마냥 받아들이게 된다고 비판했다. 이 부분을 번역할 때, sexually uptightsexually exciting 을 번역하기가 어려워 한동안 원문 그대로 놔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기억이 있다. 어찌나 고민했던지, 500쪽 가까운 이 책을 다 번역한 후에도 저 부분을 읽으면 그 원문의 구절이 퍼뜩 생각이 날만큼.

물론 대략적인 의미는 짐작을 했다. 어떤 여자가 sexually uptight하다는 것은 섹스를 하는 데 있어서 덜 개방적이고, 아무하고나 쉽게 섹스를 하지 않으며, 섹스를 만일 한다 하더라도 소극적으로 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어떤 여자가 sexually exciting하다는 것은 그와 반대로 섹스를 좋아하고 즐기고 잘 하고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의미라고 파악이 되기는 했다. 그런데 과연 저 단어들을 뭐라고 번역해야 하는지의 문제에 있어서는 한참동안 고민을 해야만 했다. 긴 시간 끝에 성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리고 성적으로 개방적이다 라는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용어를 찾아내기는 했다.  

그 과정을 지나며, 우리 말에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단어, 용어조차 다양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어떤 단어가 존재할 때는 예컨대 '여자는 조신해야지'와 같이,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규범으로써 존재한다. 남자에게는 '조신하다'라는 단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혹은 '여자가 헤프게 그게 뭐니'와 같이, '헤프다'는 표현 또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득 담고 있으며 '헤픈 남자'와 같이 남자를 묘사할 때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저 위 구절들을 번역할 때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사실 sexually exciting이라고 할 때의 exciting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면, 어떤 행위자가 그 행위를 정말로 즐거운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흥분할만큼 재미있게 그 행위를 하기를 원하고, 가장 신나는 모습으로 그 행위에 임하는 것 같은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때의 exciting이라는 단어에는 전혀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러면 sexually exciting하다는 것은 뭘까. 우리말로는 '성적으로 개방적이다'라는 예의차리는 언어로 번역했지만, 사실 sexually exciting하다는 것은 그 행위의 주체인 누군가가 섹스를 할 때 정말 즐거워하고, 자기가 하고싶은 사람과 섹스를 할 생각만 해도 기뻐하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람과 섹스를 잘 해볼 수 있을지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즐거워하고, 실제 그 사람과 섹스를 할 때 정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 즐기며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가 우리 말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나의 20대 때에는 오늘날처럼 페미니즘 문화가 유행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여성학이 한창 붐을 이루었다가 사그러질 때쯤이었던 90년대 중반에 남녀공학 대학에 입학했을 때, 게다가 보수적인 교육학과에서는 아무도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페미니즘 이야기에 열중하는 사회에서 20대를 보낸 세대들은 다르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지금 10대인 나의 딸들이 살아갈 세상은 또 다르겠지. 그래서 오늘도 나도 자꾸 뭐라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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