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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요즘 읽는 책들/기타

[피리부는 여자들] 남자가 없어도 잘 살아

by 페페연구소 2020.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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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펀딩하게 된 것은 휘슬러 냄비세트에 관한 대화를 보고 나서였다. 딸이 결혼하면 주려고 휘슬러 냄비세트를 사서 몇 년째 고이 쟁여놓는 엄마와, 독립해서 원가족에서 이사나가면서 그 냄비세트를 달라고 주장하는 딸의 대화. 

온 가족이 다 있는데 이 책이 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학교도 못 가는 요즘 집 앞에 오는 택배상자를 문 빼꼼 열고 찾아 들여오는 게 삶의 낙인 둘째가 택배상자를 들여왔다. 박스를 뜯고 책을 펼쳐서 휘슬러 냄비세트에 관한 엄마와 딸의 대화 장면을 읽어주었다. 중학생인 큰아이는 황당해하며, 몇 초간 생각하다가, 나는 그런 거 필요없다고 했다. 음.. 하고 역시 몇 초간 생각하고서, 엄마는 휘슬러 냄비세트 안 사놓을 거야, 라고 했다. 남편은 '혼자 사는 여자가 그 냄비 세트가 왜 필요해?' 라고 말했고, '세트'도 아닌, 우리 집에 딱 한 개 있는 그 무거운 휘슬러 압력솥을 본인이 독일 출장 갔다가 어떻게 어렵게 구해서 사왔는지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본인이 나를 위해 혹은 우리 집의 맛있는 식사를 위해 시간들여 알아본 것도 아니고, 출장 가서 만난 지인이 다들 사가는데 이거 왜 안 사가냐 꼭 사가라고 해서 사온 것인데. 

그래, 이 책을 보기 전부터도 이해가 갔다. 비혼을 결심한 똑똑한 여성들도, 내 인생에 지금까지 남자로 인해 기쁜 적도 원한 적도 없는데 엄마의 소원은 얼마나 황당한가 라고 말하는 이 책의 저자도. 결국 나는 참을성있게 남편의 휘슬러 압력솥 구입 자랑기가 끝나기를 기다려, 여기서의 포인트는 혼자 사는 여자가 뭘로 뭘 해먹고 안 해먹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휘슬러 냄비를 꼭 결혼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게 포인트라고 짚어주었다.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콕 짚어 말해주었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에서, 앤 퍼거슨이라는 페미니스트가 자신이 레즈비언일 수 있었던 10대 시절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인 맥락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구절을 읽었을 때도 그랬고, '피리부는 여자들'을 읽을 때도 그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부러움이다. 내가 20대 때와 지금과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연히 달라서, 나의 성적 정체성을 탐색해볼 수 있는 담론이 비록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회적으로 깔려있는 지금, '피리부는 여자들'에 나오는 작가들의 이야기처럼, 남자와의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여자들과 잘 살아볼 생각을 해보고 실천할 수 있는 지금의 현실이 부럽다. 

어쨌든 난 딸아이에게,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그 때 사줄게, 엄마는 너 결혼할 때 주려고 휘슬러 냄비세트 사놓지 않을거야, 라고 말했다. 우리 큰아이로 말할 것 같으면 며칠 전 온라인개학한 학교의 기술,가정 수업에서 모든 사람들이 결혼해서 애를 낳고 알콩달콩 살 것이다,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가지고 쌤이 질문을 했다며 분개하던 아이다. 그래, 너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내가 살아오던 세상과는 달라진 세상일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엄마도 지금 노력하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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