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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요즘 읽는 책들/기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자살한 부모의 자식들

by 페페연구소 2020.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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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페미니즘 서점 '달리,봄'의 멤버쉽이었다. 매 시즌마다 한 명의 페미니스트를 정해서, 그 분이 추천하는 책을 집으로 발송해주는 것이 매력인 멤버쉽 서비스. 약 3개월간인 이번 시즌 동안 한 권의 책만 받아보는 '달리' 회원을 신청했는데, 설명을 읽어보고 나서 두 권을 더 구매하게 되었다. 다음에는 아예 시즌동안 3권을 받아볼 수 있는 '봄' 회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번 시즌의 페미니스트 권김현영 선생님이 추천했다는 어떤 책을 쓴 작가가 그보다 먼저 쓴 책이니, 함께 읽어보면 좋다고 했다. 모두 그래픽 노블이라길래 부담없으려니 하는 생각도 있었다. 추천받은 책은 '부러진 날개'라는 책이었는데, 작가는 사실 그보다 먼저 출간한 이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유명해지자 '그럼 당신의 어머니는 어땠나요?"라는 질문을 받고서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러진 날개'를 썼다고 했다. 

저자는 스페인 사람이었고, 아버지를 화자인 '나'로 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래픽 노블이었다. 스페인의 시골마을에서, 땅을 넓히는 것만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던 어린시절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그 아이가 청년이 되었고, 도시로 갔고, 그러면서 스페인의 내전 상황과 스페인 주변 유럽국가들의 전쟁 상황이 이 남자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아나키스트였고, 전쟁을 겪었고, 결국 결혼하고 아들이 생겼고, 어쩌다 부인과 사이가 멀어졌고, 양로원에 들어갔고, 그리고 작가의 아버지인 이 남자는 90세에 양로원에서 자살을 했다.  작가는 하늘을 날고 싶었던 남자가 자유롭게 날기 위해 하늘로 몸을 던졌다고 표현한다. 

물론 맨 첫 장면에 나오기 때문에 아버지의 자살 사실을 알고 읽기는 했지만, 한 남자의 일생을 주욱 읽어나가며 그 사람의 삶에 들어갔던 상태에서 마지막 장면으로 접한 그의 자살은 나에게 한참을 책을 덮고 앉아있게 만들었다. 저녁 먹고 신나게 몸싸움하며 놀고 있는 시끄러운 아이들이 있는 거실 한복판에서. 그리고 나서 읽은 에필로그에서 만난 저 위의 문장. 작가는 자살한 부모의 자식인 본인이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는지를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썼던 아버지에 관한 이 책이, 전세계적으로 독자들간의 어떤 연합, 동맹을 만들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살한 부모의 자식들"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의 독자 동맹에 들어가는 구나 했다.

아빠가 자살한 것은 엄마에 의하면 집안의 수치였다. 절대 밖에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나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아주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책의 작가처럼, 아빠의 자살은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내가 그 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기도 하고 또 전혀 옅어지지 않기도 하는 그런 죄책감 말고는 다른 어떤 내 내면의 감정을 살펴보거나 할 기회조차 없었다. 혼자 생각하면 괴로왔고, 누군가에게는 절대 이야기하지 못할 일이었으니. 지금도 잘 이야기하지 못한다. 듣는 사람들이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서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이 나에게 상처가 되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자기도 나와 같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남자의 삶의 이야기 전부를 읽고 나서 가장 울림이 있는 부분이 설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주도면밀하게 맨 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창 밖으로 몸을 던진 90세 노인의 모습이라니. 별다른 기대 없이 읽었던 책에서 이렇게 눈물삼키는 지점과 만나게 되다니.

"우리는 상처 때문에 흉터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동맹과 같았다."(213쪽)

상처로 흉터진 얼굴을 한 전세계적인 동맹에 이제 나도 참여한 기분이다. 그런 상처가 있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심리치료 집단 말고 이런 방식으로도 가능하구나. 한 남자의 일생을 그린 책에서 이렇게 위로가 되는 지점과 만나게 되다니. 오늘 이 책을 읽은 것은 정말 운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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