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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2019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새로운 편집본으로 본 '길모퉁이 가게'

by 페페연구소 2019. 9. 5.

세어보니 여성영화제 기간 8일 중 총 6일동안 여성영화제에 출근을 했다. 페페 연구소 블로그를 열어놓고, 일단 여성영화제 영화들 리뷰로 글을 시작해보자는 마음에서 야심차게 계획했던 것인데, 사실 이제는 소화할 시간 없이 너무 많은 음식을 밀어넣어서 약간 토할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이 영화 '길모퉁이 가게'는 정선여성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두 번이나 봤던 거라 내용은 다 아니까, 이번에 편집을 새롭게 해서 달라졌다니 그런 의미에서 가보자 싶었다. 게다가 페페스터디 팀원들 두 명도 관심을 표했고, 마침 감독님의 초대권도 받을 수 있어서, 약간 토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룰루랄라~ 하며 오늘도 월드컵경기장으로 출근했다. 

초대권이란 이렇게 생긴 것~~!! 음하하~! 생각해보니 영화제의 초대권을 손에 쥐어보는 것이 처음인 것 같다. 정선여성영화제 때는 단체로 누군가가 관리했던 것 같고 서독제는 티켓을 예매해서 갔고. 아 감독님 감사합니다~! 아무튼.. 페페스터디 두 명들도 만나고 로비에서 감독님과 떠들썩하고 정신없는 시간을 갖고 드뎌 영화관으로 입장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피에서 퍼옴

'길모퉁이 가게'는 학교밖 청소년들이 자립하는 일을 함께 하기 위해, 원래는 그들의 교사였던 '씩씩이'가 창업한 도시락 배달 가게 '소풍가는 고양이'의 이야기이다. 월 매출 1,000만원이 안 되던 이 가게는 메르스 위기를 겪고 전문조리사를 영입하면서 2017년 월 매출 5,000만원을 찍는다. 우와, 학교밖 청소년들을 데리고 뭔가를 하는 가게의 성공스토리구나, 인생극장 같은 건가,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렇지 않다. 매력적인 인물들이 분명 존재한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매력적인 캐릭터 홍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하염없이 멀고도 먼 원주, 잔소리로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대표 씩씩이, 눈물 흘리며 2년 후에 다시 올게요 하고 입대한 매미, 학교가기 싫어서 집에서 컴퓨터만 하다가 왔다는 혁, 왼쪽 팔에 성당 문신이 있으니 오른쪽 팔엔 성모마리아 문신을 할까 고민하는 쫑, 모든일을 꼼꼼하게 챙기는 차차, 말없이 그 누구보다 능숙하게 칼질하는 전문조리사 나무 등등..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극장처럼, 그 매력적인 인물들을 파고드는 일을 하지 않는다.

영화 초반의 템포는 느리고 느긋하다. 버섯 세 상자를 하염없이 천천히 다듬고 있는 혁, 버섯 다듬기 싫어서 버섯들 앞에 늘어져 있는 홍아, 인턴들에게 밥 하는 법, 정확히는 다된 밥솥의 압력을 빼고 뚜껑을 여는 법을 천천히 친절하게 설명하는 매미, 늘어져서 다같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 등.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피에서 퍼옴

그런데 메르스 사태로 도시락 주문이 줄어들면서 가게에 일이 없어지는 위기가 닥친다. 그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도 9명인가 되는 모든 직원들이 모여 각자 어떤 포지션을 취할 것인가 생각해보고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권위주의적이거나 가부장적인 모습은 이 가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씩씩이는 결국 매출 증대를 위해 전문조리사 나무를 영입하기로 결정한다. 어떻게든 가게가 망하지 않도록 하고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 위한 선택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이후 분위기는 빠르게 돌아간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피에서 퍼옴

 예를 들면 이렇게 수없이 많은 빈 도시락들을 실수없이 착착 채우는 일하는 장면. 그 과정에서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실수하는 직원을 대표가 다그치는 장면.

예전의 1차 편집본에서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조금 더 두드러져서 재미있기도 했는데, 이번 편집본에서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좀 더 잘라내고,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에 충실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었다. 정확히 어떤 장면을 덜어내고 어떤 장면을 집어넣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더 몰입할 수 있는 영화가 되었다는 것. 좋은 영화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제 좋은 영화란 재미있게 보고 잊어버리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 그동안 하지 않았던 자신과 타인과 세계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도록 만드는 영화, 계속해서 생겨나는 질문으로 서로 소통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영화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영화였다.

2019.9.4.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길모퉁이 가게' 상영 후 GV

 게다가 이전의 두 번의 영화제에서보다 이번 여성영화제에서의 관객들이 질문이 더 좋아서, 이숙경감독님과 '소풍가는 고양이' 대표 씩씩이로부터 더 깊이있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던 GV였다. 월매출 1,000만원이 안 되다가 4,000만원을 목표로 잡고, 5,000만원을 넘기까지 했을 때.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있을까'라고 했던 씩씩이의 질문이 아직도 맴돈다. 멈출 수 있을까, 멈춰야 할까,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걸까. GV에서의 이야기로 이 가게는 작년 가을 이 영화가 완성되어 발표된 이후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표 씩씩이는 안식년을 갖고 있고, 홍아가 운영을 맡아서 하고 있다는. 아.. 이 가게는 그렇게 끊임없이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애쓰고 있구나 싶어 뭉클하기까지 했다. 

이숙경감독님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이 영화에서 보여진 이 가게의 과정 중 어딘가에 서 있다. 이제 막 1인연구소라고 만들어서 낑낑대는 나로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제발 돈을 좀 벌고 싶다는 소망이 있으니. 그리고 내 옆에서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GV도 좋았다는 두 명의 직장인들도, 각각 자신의 인생이란 맥락에서 그 가게가 겪어가는 과정의 어디쯤인가에 서 있기에, 그 영화가 와닿았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 영화는 특별히 페미니즘적인 주제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데도 왜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이 가게가 운영되는 방식, 그 가게를 바라보는 감독의 철학, 이 가게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드러내는 방식 자체가, 가부장적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진작에 1970년대 서구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적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둘 다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이 영화는 권위주의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와 이윤과 효율성 추구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둘 다에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는, 관객들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게 만들고 있다. 나는 과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 어디쯤에 서 있는가. 나는 지금 잘 서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 영화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6일간에 걸친 여성영화제 출근의 마무리로써 정말 완벽한 영화였다. '소풍가는 고양이'도 이숙경감독님도 나도 나와 함께 영화를 본 페페스터디 멤버들도 그리고 이 영화를 본 모든 사람들도, 이 거대한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 각자의 위치 어딘가쯤에서, 잘 살아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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