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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2019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by 페페연구소 2019. 9. 4.

나는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왕 팬 혹은 광 팬은 아니다. 아녜스 바르다에게 따라붙는, '누벨바그의 대모'라나 할 때의 누벨바그가 뭔지도 모른다. 그녀가 호평받은 첫 영화를 찍을 때 난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헐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만 보다가 20대를 보낸 나는 그녀의 숱한 작품들을 볼 기회도 없었다. 작년 여성영화제 개막작이었던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보기 전까지는.

원래도 그 영화를 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 영화를 보고 온 지인들이 엄청 좋아하며 말하는 것을 듣고 그럼 한 번 봐볼까 해서, 집 근처 독립영화관을 찾아갔던 것이다. 알고보니 1955년부터 영화를 만들어서 2019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영화를 만들었던 아녜스 바르다의 거의 인생 마지막 영화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단 하나의 영화는 나를 사로잡았다. 난 그 이후 극장에 한 번 더 가서 그 영화를 보았고, 그 이전까지 나에게 그런 것이 없었지만 그 영화는 나의 '인생 영화'가 되었다.

일본에 있을 때,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사망을 알리는 뉴스를 봤다. 아 그랬구나 했고 뭔가 기분이 묘했다. 올해 여성영화제에 그녀를 추모하는 섹션이 열렸고, 나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보러 갔다. 그 감독이 자신의 영화들에 대해 말하는 영화라고 했다. 그녀의 영화를 본 것이 없기 때문에 과연 재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갔다. 따뜻함과 유머, 인생에 대한 진지함과 장난스러움이 동시에 드러나던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8456에서 퍼옴.

조금 이상했다. 이 여자는 전세계 영화계에 여성 감독이 거의 없었을 때부터 그 판에서 남자들에게도 인정받으며 굳건히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사람 같았다. 나의 편견으로는 그런 여자는 강하고 센 여자일 것 같은데, 내가 본 영화에서 보여지는 이 할머니 감독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카메라 너머의 사람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버려진 감자더미에서 감자줍는 사람을 촬영하다 발견한 하트 모양의 감자를 작품으로 만든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영화만 찍은 게 아니라 다각도의 아티스트였다. 아직도 어디선가 한다면 가서 보고 싶다. 아녜스 바르다의 감자 작품 전시.

https://arts.uchicago.edu/cinévardaexpo/public-events에서 퍼옴.

 내가 모르는 영화 이야기만 계속 나오다가 마지막에는 내가 아는 단 하나의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말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고 원제로는 영어 번역처럼 'Faces, Places'라는 뜻. 그 영화를 보고서 사진작가 JR에 대해 찾아보고 난 후 난 그 영화에 나오는 사람 얼굴 사진 프로젝트가 JR이 하던 일이었고, 아녜스 바르다는 거기에 숟가락만 얹은 것인 줄 착각했다. 하지만 서른 몇 살인 JR은 JR의 방식대로, 그 때 당시 여든아홉살인 아녜스 바르다는 또 자신만의 방식대로, 사람을 드러내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왔던 것이다. 안 그래도 어쩌다 저 두 사람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프로젝트를 같이 하게 되었을까 궁금했는데, 결국 사람에게 관심갖고 사람을 드러내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오던 두 사람이 만난 것이 이상한 일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아아... 바다인지 모래인지 바람인지 안개인지.. 이런 엔딩이라니...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게, 아니, '바르다를 사랑한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2019년 3월 29일, 그녀가 사망했을 때 사진작가 JR이 미국의 Time지에 기고한 글을 발견했다. 

When you looked at me and Agnès Varda, you saw a young guy and an old woman. But as I got to know her, I lost that sense of age. That’s because she was always in the present, always active. Until her death at 90 on March 29, she was planning what she would do next. She was in the moment, not in the nostalgia of the great life she had. That’s how she kept making it greater.

 맞다, 그들은 55세의 나이차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친구가 되었고, 55세 아래인 아녜스의 친구 JR은 그녀는 항상 현재를 살았기 때문에 나이차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 이 영화('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보러 가면 뭔가 그녀에게서 배울 점이 있을 줄 알았다. 나도 그녀처럼, 과거의 향수에 사로잡히지 않고, 항상 현재를 살고, 그러면서 또 미래를 바라보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아녜스 바르다... 잊지 못할 것 같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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