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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2019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

by 페페연구소 2019. 8. 30.

재작년 개막작이었던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본 이후로 여성영화제 개막작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생겼다. 개막작은 절대로 좋은 영화일 것이라는. 게다가 올해 개막작은 내가 평소 페미니스트이자 기독교인으로서 계속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문제와 맞닿아있는 것 같은 주제였다. '뭐? 강에 던져진 십자가를 헤엄쳐서 제일 먼저 잡은 사람-남자가 그 해의 행운을 갖는다고? 뭐 이런 설정이? 이거 다큐야 극영화야?' 라고 생각하며 자세히 보니 극영화였다. 남자들만이 할 수 있는 그 십자가 잡기 대회에 어떤 여자가 뛰어들어 십자가를 잡았다고 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라고 했다. ㅎㅎㅎ 가부장적인 기독교사회에서 정말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었다. 

흠.. 어느 나라 영화인지 자세히 보지는 않고 왔는데, 감독이 마케도니아 사람이라고? 마케도니아가 그 옛날 알렉산더 대왕 때만 존재하던 나라가 아니라 요즘에도 존재하는 나라의 이름이란 말인가?? 고등학교 때 역사를 싫어해서 그 이후로도 죽 안좋아하는 나에게는 마케도니아라는 나라 이름이 생소했다. 또 막 검색해보니, 지금 실제로 존재하는, 우리나라 크기의 1/8만한 작은 나라였다. 그리스 위쪽에 있다. 역시 영화의 힘이란... 오늘 나에게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나라 하나를 검색하게 만들었다. ㅎ

어쨌거나 내가 마케도니아를 알든 모르든 영화는 시작됐고...

취직 못한 페트루냐, 페트루냐에게 면접용 꽃무늬 원피스를 빌려준 친구, 페트루냐를 몰아세우는 엄마, 소개받아 간 면접자리에서 사장에게 성추행 당하는 페트루냐... 페트루냐는 십자가 잡기 대회가 열리고 있는 거리 한복판을 통과하다가 문득 물에 들어가 십자가를 잡고, 그 자리에 있던 웃통벗은 남자들에게 십자가를 빼앗기고, 조롱당한다. 집으로 돌아온 후 엄마의 태도도 가관... 경찰들이 난리가 났고 결국 페트루냐를 경찰서로 데려가며, 신부님은 십자가를 내놓을 것을 종용하고, 게다가 그 웃통벗고 수영하던 남자들의 떼거리는... 

아직 영화제가 끝나지 않아 스포를 자제하려니 입이 근질근질하다. 영화제가 끝나고 나면 스포 가득, 할 말 다 하는 버전으로 업데이트 해야지. 어쨌든, 보는 동안 기가 차고 실소가 나오고 갑갑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무거운 생각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엔딩은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을 무겁지만은 않게 그래도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게 해주었다. 누구보다 용감한 그 여자 페트루냐의 여운이 진하게 남는다. 용감하다는 건 무엇일까. 페트루냐는 어쩌면 처음부터 원대한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려 했던 게 아니라, 그냥, 자신의 느낌과 욕구에 충실하게, 그러다 보니 그냥, 하게 되었던 건 아닐까. 용기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울림이 있는 영화였다.

 영화를 하나의 작품으로 존중하고, 영화가 끝나면 박수를 치는 여성영화제의 전통이 오늘따라 참 좋았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여성영화제에서는 보통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영화관의 불을 켜지 않고 관객들도 다 앉아서 엔딩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야외라 켤 불이 없어서 그런건지 사람들이 마구 일어서서 나갔다는 점. 하지만 덕분에 의도치 않게 늦게까지 앉아있다가, 개막식을 기념할만한 사진을 한 장 더 건지긴 했다. 

개막식아 이제 안녕. 페트루냐도 안녕. 내일부턴 안락한 실내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겠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원래 예매해두었던 '여성 쾌락' 말고도 오후에 상영하는 영화를 한 편 더 보고 싶어져서 '멜랑콜리 걸'을 급예매했다. 역시 변영주감독님 말대로, 매진되었다지만 아직 표는 있었다 ㅎㅎ. 

여러 해 동안 매년 오던 여성영화제인데, 왜 올해 이렇게 유독 기분이 좋을까 자문해보았다. 어쩌면 작년 줌마네의 자기기록 글쓰기 워크샵을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 내가 예전부터 영화를 좋아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그런 걸까. 억압적인 엄마 밑에서 사느라 사는게 고단하고 힘들었던 그 때, 영화보는 일은 나에게 쉼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혼밥 혼술 등 사람들이 밖에서 혼자서 뭔가를 하는 일이 흔한 일이라 혼자 영화보는 사람들도 많아졌지만, 딱히 혼자 영화보는 인간들이 많지 않았던 20년 전 그 때에도 혼자서 영화를 보러 다녔던 것 같다. 그래, 내가 나를 몰라서 그랬지 나는 예전부터 영화를 좋아하던 인간이었구나, 이제 나를 알았으니 더 더 더 마음껏 좋아해보자 하는 뭐 그런 무의식이 발동한 걸까. 어쨌거나 개막식을 보고 오는 기분이 정말로 좋았다. 내일 영화들을 포함해 주루룩 예매해놓은 일곱개의 영화들도 기대된다. 흐흐.. 내일도 영화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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