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오늘의 구절

[4장. 미국의 유색인종 페미니즘(들)] 틈새성

by 페페연구소 2019. 11. 15.
레슬리 보(Leslie Bow)는 (미국 원주민과 메스티사뿐 아니라) 아시아계 미국인을 '틈새 인구(interstitial population)', 혹은 미국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주요 인종 범주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인구라고 정체화했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215쪽)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식민지의 샌드위치"라고 불려왔던 것의 일부분이었다. 꼭대기에 유럽인이, 가운데에 아시아인이, 바닥에 아프리카인이 있는 것이다. 레슬리 보는 페미니즘을 위한 교훈은 분명하다고 말했따. "정체성의 사회적 실현과 그 이상화(idealization) 사이의 공간은 다양한 징후로 사회적 힘을 공고히 하는 구조를 드러낸다." 인종적 틈새성(interstitiality)이 이론적으로는 위계질서를 파헤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해도, 아시아계 미국인의 경험을 사례로 삼아 본다면 항상 그렇지는 않다. (217쪽)

이제는 위치성이 아니라 틈새성인건가. 이 책의 2판 번역본은 적어도 여러 번 읽어보아서 이제 웬만한 내용은 다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틈새성은 이번에 처음 들은 것 같다. 이런 순간에 책을 읽는 희열을 느낀다! 다만 레슬리 보의 오리지널 글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틈새성에 대해 뭔가 좀 더 친절한 설명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있다. 

어쨌거나 요지는 아무리 위치성이 개인의 사회적 위치에 따른 여러가지 교차하는 억압들을 설명하는 훌륭한 개념이라 하더라도, 그 위치들이 교차하는 바로 그 틈새에 있는 것들은 눈에 드러나지 않으며 무시당하고 억압받기가 더 쉽다는 것인 듯 하다. 미국에서 소위 인종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흑과 백만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황(실제로 영어로 yellow라 칭한다)인이라는 분류, 주로 아시아계 미국인이라고 칭해지는 그 집단은 흑과 백의 사이에 끼어있는 집단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교차하는 위치성을 흑과 백으로만 표현하던 판에 그 사이에 끼인 황도 있어~ 라고 주장하는, 그런 느낌이다. 

다만 내가 미국에서 느꼈던 바와 레슬리 보의 설명은 약간 달라서 좀 갸우뚱하기는 했다. 유학생 시절의 4년, 남편따라 갔던 1년, 총 5년의 미국생활에서 내가 느낀 것은 Minority 중에서는 흑인이 제일 세력이 크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minority 얘기를 해도, 백인에 대비되는 흑인이 그 중에서는 가장 큰 세력이었다. 아시아인이라는 명칭 또한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색해보니 아시아대륙은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대륙이고, 아시아에는 전지구 인구의 60%가 거주한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 드넓은 땅덩어리의 다양한 나라들이 그냥 다 '아시아'였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도 않고 딱히 관심가질 일이 없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에서 온 어떤 대학원생이랑 나랑 전혀 공통점 따위는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우리는 다 '아시안'이었다. 그렇게 취급당하는 것이 어처구니 없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레슬리 보의 주장처럼 위아래가 있는 샌드위치로 인종을 표현했을 때 아시아인이 가운데에 온다고 한다면, 마치 아시아인이 중간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 내 경험은 설명받을 데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에는 이후에 다시 틈새성 개념의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매력적인 것 같은 틈새성의 개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슬리 보우의 2007년 논문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구소 홍보를 위해 페북 트위터에 인스타까지 계정을 만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느낀 점은 온라인 페미니즘 판에는 아줌마 페미니스트들의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니, 적어도 가시화되지 않는다는 점. '정치하는 엄마들' 빼고는 그런 것 같다. 대부분 20,30대인 비혼여성들 판인 것 같고, 나같은 아줌마 페미니스트들은 이런저런 표현을 온라인상에서 할 데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오프라인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어정쩡한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개념이 바로 이 틈새성, 영어 단어도 어려운 interstitiality, 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그래서 이 용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반가웠나 보다.

이 틈새성 개념에 힘입어 아줌마 페미니스트 서사가 널리 퍼지고 보편화되는 그 날까지, 여러 여자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일을 잘 기획하고 해보아야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