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오늘의 구절

[4장. 미국의 유색인종 페미니즘(들)] 나의 모순점들과 조화롭게 사는 법

by 페페연구소 2019. 11. 11.
항상 누군가는 당신에게 당신 자신의 어떤 한 부분, 즉 흑인인지, 여성인지, 어머니인지, 레즈비언인지, 교사인지 등을 분명히 드러내라고 요구합니다. 이는 그들이 그것을 정답으로 삼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다른 모든 것을 묵살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당신의 그 특정 부분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길을 잃을 것이고, 또한 다른 모든 부분들을 드러나지 않게 가두는 데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위해 쓸 에너지가 제한될 것입니다. 당신의 모순점들과 조화롭게 사는 법을 배울 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그 모든 것들이 잘 흘러가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198쪽)

위의 글은 칼라 해먼드라는 여자가 1981년에 오드리 로드(Audre Lorde)를 인터뷰한 내용에서 따온 인용문이다. 이 부분은 그 동안 여러 번 읽을 때는 몰랐는데, 새로이 이번 판을 번역하면서 확 눈에 들어온 구절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페미니스트인가 하는 질문을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기도 하지만 타인들이 나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즉 저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 특히나 결혼을 했는데 페미니스트라고, 이런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결혼했고 페미니스트다. 나는 아이 두 명을 키우고 있고 페미니스트다. 나는 남편이란 존재와 함께 살고 있고 페미니스트다. 결혼생활이란 페미니즘 전투의 최전선이라는 말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아마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라는, 페미니즘 책읽기 모임 하는 기혼여성들이 함께 쓴 책에서일 것이다. 페미니스트이고 비혼인 사람들 혹은 어쨌든 페미니스트이고 남자와 결혼하지 않은 상태의 사람들보다 기혼 페미니스트들은 훨씬 더 치열하게 매일을 산다. 아는 것은 많지만 막상 닥친 현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저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매일 맞닥뜨리며 살아간다. 그 누구도 기혼 페미니스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정체화하는 이유는 저 위에 나온 것처럼 "그들이 그것을 정답으로 삼을 필요가 있"고, "다른 모든 것을 묵살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래야 편하니까. 전쟁터에서 네 편 내 편이 분명해야 잘 싸울 수 있으니까,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모순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 어느 페미니스트도, 아니 그 어느 인간도 모순점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나의 모순점들을 스스로 인정하고, 또 그 "모순점들과 조화롭게 사는 법을 배울 때에"야, 내 인생의 그 모든 부분부분들이 잘 흘러가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드리 로드의 1981년의 말이, 지금 나의 삶에 정말로 깊이 와서 박히는 것을 느낀다.

흑인이고 레즈비언이고 유방암에 걸렸던 적이 있고 가난했다던 오드리 로드는 그녀의 삶에서 어떤 모순점들을 끌어안고 살았을까.

Audre Lorde. (출처: https://www.newstatesman.com)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을 책 속에서 만났지만 모든 사람들의 삶이 다 궁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나에게 이렇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런 말을 했던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길래 저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걸까. 이런 궁금증으로 오드리 로드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가 얼마나 엄청난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모으게 되기 시작하자, 그의 삶을 한 단락 혹은 몇 단락으로라도 여기에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라고 느껴졌다. 

뉴욕의 할렘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은 모두 카리브해에 있는 작은 섬나라 출신이었다. 백인 페미니즘이 지배적인 시대에 흑인 여성의 목소리를 냈고, 남성 문학이 지배하는 문단에서 여성 시인으로 글을 썼고, 이성애자들이 지배적인 곳에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게다가 남자랑 결혼해서 사는 동안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 엄마였다. 유방암으로 유방절제를 해야 했으며, 그러고 몇 년 후 간암이 발병하여 5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마지막 파트너하고는 부모님의 고향 언저리인 카리브해의 St.Croix라는 섬에서 살면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녀의 많은 저서 중 딱 한 권 '시스터 아웃사이더'가 한국어 번역본이 있어서 얼른 샀다. 찾아보니 그 책이 출간되던 2018년 10월, 페미니즘 카페 두잉에서 열렸던 북토크 기사가 올라와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출간 기념 특강) 알고보니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이었다. 나만 잘 몰랐을 뿐.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얼른 읽어보고 싶고, 그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 유방암에 걸렸던 자신의 경험을 쓴 Cander Journal도 읽고 싶다. 치열하고 힘들었을 그의 삶이 마지막에라도 편안했기를. 그리고 지금도 편안하기를. 1992년에 사망했다니까 내가 고등학생 때구나. 아주 많이 뒤늦었지만,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보아 알게된 지금, 지금이라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