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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오늘의 구절

[1장. 자유주의 페미니즘] 170년 전 그 날, '극단적'인 여성 참정권 요구

by 페페연구소 2019. 9. 20.
세니커폴스 대회에서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지 못한 단 하나의 결의안은 아홉 번째 조항인 수전 앤서니(Susan Anthony)의 여성 참정권 결의안이었다. 즉, "결단코 신성한 선거권을 확보하는 것은 이 나라 여성들의 의무다"라는 조항이다. 대회에 참석한 다수의 대표들은 다른 모든 요구가 거부될까 두려워 그러한 '극단적' 요구를 밀어붙이기를 꺼려했다. 그럼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프레데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의 도움으로, 이 아홉 번째 조항은 겨우 통과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인 문제에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행동하기에 거리낌이 없는 여자들도 존재하지만, 사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역사와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역사에 관심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 좋아하던 학교 선생님이 세계사 선생님이라, 기를 쓰고 공부해서 세계사 시험은 늘 거의 100점을 받았으니까. 물론 딱히 세계사에 대한 관심이라기 보다는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세계사도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역사는 나에게 졸리고 지루한 암기과목이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니 학회에서 한국 근현대사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 졸리고 지루한 역사책을 대학에 와서까지 왜 읽나 싶어서 읽지도 않았고 학회에도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정치는 남의 일이었다. 때마다 투표를 하기는 했지만 별 생각없이 했고, 정치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29살에 처음 페미니즘을 접했을 때도, 페미니즘을 역사나 정치와 깊이 관련지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역사와 정치에 대한 관심은 살다보니... 그야말로 살다보니...... 생기게 되었다. 페미니즘도, 내 전공인 평생교육도, 공부를 계속 하다 보니, 역사와 정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겨우겨우 깨닫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역사와 정치는 내 분야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는 한다. 

그런데 이 페미니즘 책은 페미니스트들의 역사와 정치로 가득하다. 더이상 무관심할 수가 없다. 페미니즘의 이론이라는 것이 학자들이 밀실에서 쑥덕쑥덕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정치와 역사 그 자체인 현실 속에 뿌리박은 것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가장 큰 성과로 불리는 여성 참정권 획득을 그래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미국의 '독립 선언'에 대응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입장 선언'이 있었던 그 날, 그 집회에 모인 여성들에게조차도 너무나 과격하고 "극단적"인 요구였던 여성 참정권에 대한 요구는, 아이러니하게도 흑인 남자인 프레데릭 더글러스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입장 선언'에 따르는 결의안 항목에 포함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타임 슬립이 가능하다면, 지금으로부터 171년전인 1848년 뉴욕 주의 세니커폴스라는 도시에서 열린 그 때 그 회의에 슬쩍 끼어들어가보고 싶어졌다. 서로를 같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과격한' 참정권 요구는 할 수 없다는 페미니스트들로 인해 참정권 요구를 할 수 없을 뻔했던 그 때, 참정권 요구를 하던 페미니스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그 안건이 흑인 남성의 도움으로 통과되었을 때의 그 현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1948년 Seneca Falls Convention 풍경 그림. https://www.c4women.org에서 퍼옴.

요즘 학생들의 말로 '페미 한다'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 페미니즘을 알고자 하고 실천하고자 한다는 의미로 '페미 한다'는 표현을 내 나름 이해할 때, 페미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자들끼리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 세상의 절반인 남자와 함께 해나가야 하는 일일 것이다. 결코 쉽지 않다. 1848년 세니커폴스 대회를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이 시작된 날이라고 본다면, 그 이후로 72년간의 투쟁 끝에 192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참정권을 얻었으니. 아.. 그러면 참정권 투쟁 하다가 죽는 날까지 그 날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은 여자들도 있다는 이야기일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던 그 수많은 여성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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