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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를 추모하며

by 페페연구소 2021.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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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의 부고를 sns에서 보았다. 어제 12월 15일 자택에서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한 가운데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한동안 주욱 아팠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내가 Teaching Community의 한국어판 서문을 부탁하는 이메일을 쓰던 그 때 이미 아팠겠구나 싶었다. 직계가족이 아닌 누군가의 죽음에 이토록 눈물이 나기는 처음인 것 같다. 부고 뉴스를 보며 울었다. 

미국 유학 시절, 페미니즘 이론 수업에서 처음으로 책의 한 챕터로 접한 벨 훅스의 글은 그 때 당시 배우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내가 벨 훅스의 팬이 되기 시작했던 것은 귀국 후 그의 책 '경계넘기를 가르치기'를 처음 읽고 나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론에서 치유의 공간을 발견했다. (p.76)
이론화 공간에서는 비판적 사고와 성찰과 분석을 마음껏 '실행'할 수 있었다.
상처를 설명하고 그 상처가 사라지도록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p.78)
교실은 흥이 나는 곳이어야 하며 절대로 지루해서는 안 된다. (p.14)
강의실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서로에 대해, 그리고 서로의 말소리와 존재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보이느냐에 따라 흥을 낼 수 있는 능력은 크게 달라진다. ... 흥은 공동의 노력으로 돋워진다. (p.15)

 

세상에, 강의실이 '흥이'나는 곳이어야 한다니! 초중고, 대학과 대학원으로 한국교육에서 약 12년, 미국교육에서 약 4년, 즉 인생에서 아주 긴 긴 시간 동안을 학교라는 곳에서 보냈던 내가 과연 '흥'이 나는 강의실을 경험한 적이 있던가! 그런데 이 사람은 세상에, 강의실이 흥이 나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구나! 그럼 나는 내가 가르치는 강의실을 '흥'이 나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충격들과 함께 '경계넘기를 가르치기'라는 책이 나에게 다가왔다.

또한 이 사람은 '이론'이라는 것이 상아탑 꼭대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일상과 연관된 것이며, 더더군다나 나의 상처를 설명하고 상처를 치유받는 장소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아마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어떤 강의실에 들어가든지 그 강의실이 '공동의 노력'으로 '흥'이 날 수 있는 강의실에 조금이라도 가까울 수 있도록 매 강의마다 고민에 고민을 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조금씩 해 보았던 나의 힘의 원천은 아마도 벨 훅스였을 것이다. 어떤 대학원생에게서 '우리들의 벨 훅스'라는 찬사를 들었을 때는 감히 내가 벨 훅스에 비교되다니 너무도 황송해서 아마 못 들은 척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난 봄-여름, 꼬박 4개월간 앉아서 벨 훅스의 책을 번역하면서, 언젠가 그와 만날 날을 꿈꾸었다. 나의 머리, 마음, 정신 속에서 벨 훅스는 나의 최애 페미니스트이자 우상이자 영웅이었다. 그랬다는 것을 그의 부고를 보고서야 알았다. 영어권의 여러 매체들이 벨 훅스의 죽음을 전하면서, 그가 생전에 거의 매일 누군가로부터 편지나 이메일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책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에 관한 편지나 이메일들. 나는 왜 그런 편지나 이메일을 할 생각조차 못했을까. 

찾아보니 집에 벨 훅스 책이 10권이 있다. 영어책과 한글책, 벨 훅스의 글이 들어간 챕터가 있는 책까지 모두. 이사오면서 버린 책 두 권까지 치면 우리 집에 총 12권의 벨 훅스 책이 존재했던 셈이다. 페페연구소의 첫 사업 중 하나는 벨 훅스의 책 5권을 시리즈로 읽는 독서모임이었다. 벨 훅스의 영어책 1권을 또다른 독서모임에서 읽었고, 그 책을 번역했다. 내년에 출간예정이다. 이토록 벨 훅스와 연결되어있었으면서 왜 나는 편지나 이메일을 보낼 생각을 못했을까 이제서야 뒤늦게 후회해본다. 

나 뿐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쳐서 2020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100명의 인물에 포함되기도 했던 벨 훅스. 그의 죽음을 기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의 부고를 읽으며 흘렸던 오늘의 내 눈물이 언젠가는 또 다른 눈물을 치유할 힘을 가진 결실이 되기를. 벨 훅스가 그랬던 것처럼. 

Rest In Peace 라고 중얼거리다가, 록산 게이가 그를 추모하며 했다는 말처럼, Rest In Power 라고 끄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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